언론보도
[기사] 프로게이머에서 속기사로... "제 손 빠르죠?"
관리자 2021-11-03 19895
"밀고 들어갑니다! 이거 막아야 하거든요!"
게임 해설가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게임 화면 속 유닛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짧은 간격으로 키보드와 마우스 버튼이 눌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2일 오후 경남도의회에서 열린 '경남 e스포츠 발전을 위한 토론회' 장면이다. 의회에서 열린 e스포츠 경기는 이번이 처음이다.'e스포츠 진흥에 관한 조례'를 제안한 신상훈(더불어민주당·비례) 경남도의원은 토론회 식전 행사로 스타크래프트 경기를 마련했다. 신 의원은 헤드셋을 착용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이는 전직 프로게이머이자 경남도의회 속기사 강기훈(28) 주무관이다.
의회 내에서 강 주무관이 프로게이머 출신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평소 게임에 관심이 많은 경남도청과 도의회 직원들이 강 주무관을 찾아오기도 한다.
강 주무관은 "게임을 청소년만 즐기는 비주류 문화로 치부하지 말고, 하나의 보편적인 문화로 인정해 게이머들을 존중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에 발의되는 조례안이 e스포츠 인식 개선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지역에서 e스포츠가 하나의 건전한 여가·문화 생활로 정착되길 바라고 있다.
◇하루 15시간 게임만 = "돌아보면 살면서 가장 열정이 넘쳤던 시기고, 앞으로 한 분야에 그렇게 몰두할 만한 일이 또 있을까 싶어요. 나태해질 때마다 그때의 나를 기억하면서 의지를 다지곤 합니다."
강 주무관은 한때 촉망받는 프로게이머였다. 2007년 중학생이던 그는 텔레비전으로 스타크래프트 결승전을 봤다. 당시 신인이었던 김택용 선수가 압도적으로 게임에서 이기는 모습에 반해 '프로게이머'의 꿈을 키웠다.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아마추어 게이머가 됐지만, 게이머의 세계는 냉혹했다. 서로 경쟁을 벌여 '아마추어-준프로-프로' 단계를 밟아야만 프로에 입단할 수 있다. 프로게이머로 입단하고 나서도 1군과 2군으로 나눠 활동했다. 그는 2011년 SK텔레콤 T1에 입단하게 된다. 정해진 숙소와 연습실만 오갔다. 밥 먹고, 자고, 게임만 했다. 하루에 많으면 15시간씩 모니터 앞에 앉아야 했다.
시간이 갈수록 실력은 나아졌지만, 2군에서 1군으로 넘어가기엔 벽이 너무 높았다. 당시 강 주무관이 몸담은 SK텔레콤 T1은 강팀이었다. 실력 있는 선배들이 자리를 꿰찼다.
◇프로게이머에서 속기사로 =그러던 사이 큰 변화가 찾아왔다. 게임 제작사 블리자드에서 후속작 '스타크래프트2'를 내놨다. 게임 그래픽, 유닛, 인터페이스마저 달라졌다. 후속작에 적응 못한 많은 프로게이머가 게임판을 떠났다. 강 주무관도 그들 중 하나였다. 21세, 중졸. 그는 검정고시로 고졸 자격부터 취득했다. 1년 내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갔다. 배달 오토바이를 몰다 교통사고로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때 대학 진학이냐, 공무원이냐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공무원 시험 응시 직렬을 보다가 '속기'란 단어를 보게 됐다. 프로게이머 활동으로 누구보다 손이 빠른 만큼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 길로 부산에 있는 속기학원을 찾아갔다. 불과 1년 사이 인생이 바뀌었다. 그해 속기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프로게이머 무대 위에서 내려온 그는 이제 지방의회 현장의 목소리를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기록으로 보존해 역사로 남기고 있다. 강 주무관은 "제 기록이 후대까지 영구 보존된다는 생각을 하며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2021. 11. 0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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